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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전문시절의윤동주


  ▲ 연희본관 앞에서 (앞줄 우측 2번째 윤동주)

윤동주는 22세가 되던 해인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4월 9일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도서관 촉탁의 이름으로 있던 최현배 선생에게서 조선어를 배우고, 이양하 교수에게서 영시를 배우게 된다.


  ▲ 교수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윤동주
    (서 있는 사람 중 좌측 2번째 윤동주)
“당시 일제의 증오의 대상이 된 연희전문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때에 민족 운동의 본산인 연희동산을 찾아오는 이들은 다 제각기 뜻이 있어 온 젊은이들이었다.” “동주와 자주 거닐던 연세 동산의 산길들, 특히 청송대의 소리길들, 산 밑 잔디밭, 그의 보금자리요 시작(詩作)의 산실인 기숙사의 천장이 낮은 다락방, 이 모두가 동주의 눈길과 소리가 어린 곳이었고 그의 시의 만상의 원천이었다.”

▲ 창경궁 온실앞에서 (우측 4번째)
“연희동산이 동주에게 기독교 정신과 더불어 자유 사상을 익혀서 세계적인 인간상을 기르게 하고… 그리하여 그의 역작들 중 가장 유명한 33편이 모두 이 시기 연희동산에서 생산되었다.” “이양하 선생 등을 모시고 숲속에서 사제 간에 담배를 피우며 은밀한 대화를 하던 것도 잊을 수 없다.” - 유영(연희전문 동기, 전 연세대 영문과 교수)

윤동주는 여름 방학에 고향 용정의 북부(감리)교회 하계 아동 성경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용정 감리교회에서는 하기 아동 성경학교를 경영했다. 동주는 교사로서는 가장 적임자였다. 흔히 크리스챤이 풍기기 쉬운 형식주의, 위선적인 냄새가 그에게는 없었다. 영어로 된 성경책을 주머니에 넣고 빈손으로 교회에 나갔다.” (장덕순)

▲ 연희전문학교 기숙사(핀슨홀)의 전경

윤동주는 1학년과 3학년 때 기숙사에서 지내왔다고 한다. 윤동주가 지낸 기숙사는 핀슨홀로 현재 윤동주 기념관이 이 핀슨홀 2층에 있다.

“동주는 꿈에 그리던 연희전문에 왔다. 혼자 온 것이 아니라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더불어 왔다. 얼굴도 비슷하고 키도 비슷해서 마치 쌍둥이 같았다. 처음에는 지금 시비가 세워진 곳 뒤에 있던 기숙사에서 같이 지냈다.” (유영)

1939년 윤동주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1.23), 시 「유언」(2.6), 「아우의 인상화」(10.17)를 윤동주(尹東柱)와 윤주(尹柱)란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또한 동시 「산울림」을 《소년》(3월호)에 윤동주(尹童舟)란 이름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 후배 정병욱과 함께 (좌측 윤동주)

1940년 윤동주는 새로 연희전문에 입학한 하동 학생 정병욱(1922-1982)을 만나게 된다. 윤동주와 정병욱의 인연 역시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나중의 일이 되지만,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의 부인인 정덕희 여사는 정병욱의 여동생이다. 또한 정병욱은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 배우던 ‘잊지 못할 윤동주’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화여전 구내의 협성교회에 다니며, 케이블 목사 보인이 지도하던 영어 성서반에 참석하기도 한다. 윤동주는 이 합동 성서반원에 속하는 이화여전 여학생 중 한 사람을 묵묵히 좋아했다고 한다. (정병욱의 증언)

▲ 연희전문, 이화여전 성서연구반과 함께 (뒷줄 우측 1번째)

1941년 5월 윤동주는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종로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시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게 된다. 9월에, 요시찰인인 주인 김송씨와 학생들에 대한 경찰의 주목이 심하여 그곳을 나와 북아현동의 전문적인 하숙집으로 옮기게 된다. 정병욱의 말에 따르면 윤동주가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긴 이유는 이화여전의 영어 성서반의 여학생 때문이라고 한다.

“동주는 교실과 서재의 구별이 없는 친구다. 이렇게 보면 교실과 하숙방, 그리고 생활 전부가 모두 그의 창작의 산실이었다.” (유영)

1941년 12월 27일,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게 된다.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작품을 모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본래 예정했던 시집 제목은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상징인「병원」이었으나 「서시」가 씌어진 후 위와 같은 제목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같은 시고집 3부를 작성하여 가장 존경하는 교수인 이양하 선생과 친한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제의 검열에 의해서 시가 통과되지 못할 것이라는 이양하 교수의 권고에 의해 윤동주는 출판을 단념하게 된다. 정병욱이 받게 된 시고집 1부는 정병욱이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에 자신의 집에 소중히 보관해 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윤동주의 시를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정병욱 보관본에 의한 것이다.


  ▲ 윤동주의 학적부와 성적표

윤동주의 일생에서 ‘연희 전문학교 시절’은 시 창작에 있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연희 전문학교의 학풍과 수려한 풍경은 윤동주에게 빼어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고 이런 바탕에 힘입어 현재 주옥같은 시를 많이 창작한 시인으로 각인되어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